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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역학

강–약 설계(Capacity Design)

by adkim1 2025. 12. 18.

구조 설계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모두를 강하게 만들 수 없다면,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가?” 현실의 구조물은 재료, 비용, 시공성이라는 한계 안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부재를 동일하게 강하게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재난 상황에서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강–약 설계는 이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즉, 구조물 전체의 강도를 무작위로 키우는 대신, 어떤 부재는 반드시 버티게 하고, 어떤 부재는 먼저 항복하도록 의도하는 설계 전략이다. 이 개념의 핵심은 강도의 크기가 아니라, 강도의 위계다.

 

 

강–약 설계(Capacity Design)

 

 

지진이나 극한 하중이 작용하면 구조물 내부에서는 항복이 가장 약한 지점부터 시작된다. 이때 모든 부재가 비슷한 강도를 가지고 있다면, 항복은 예측할 수 없는 위치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하중 전달 경로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강–약 설계는 이 혼란을 막기 위해
하중을 전달하는 핵심 부재와, 에너지를 흡수하도록 희생될 부재를 명확히 구분한다. 대표적인 원칙이 바로 “기둥은 강하게, 보는 약하게”라는 사고다. 기둥은 상부 하중을 지탱하는 생명선이기 때문에 끝까지 기능을 유지해야 하고, 보는 소성 힌지를 형성하며 에너지를 흡수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렇게 역할을 나누면, 구조는 흔들리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강–약 설계에서 ‘약하다’는 말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의 약함은 의도된 항복 능력을 뜻한다. 약하게 설계된 부재는
갑작스럽게 부러지지 않고, 충분한 변형을 동반하며 천천히 항복한다. 그 과정에서 지진 에너지를 소성 변형으로 소비하고, 구조 전체가 붕괴로 가는 시간을 늦춘다. 반대로 강하게 설계된 부재는 이 항복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형태를 유지하며 하중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즉, 강–약 설계는 단순한 강도 배분이 아니라, 시간을 벌어주는 구조적 역할 분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설계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붕괴를 피하는 것이 아니다. 붕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그 붕괴가 갑작스럽고 치명적인 방식으로 오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강–약 설계가 적용된 구조는 소성 힌지가 예측된 위치에서 순차적으로 형성되고, 붕괴 메커니즘이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 결과 구조물은 큰 손상을 입더라도 사람이 대피할 수 있는 시간과, 사후 복구가 가능한 상태를 남긴다.
강–약 설계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모두를 지키려 하지 말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나머지를 설계하라고. 이것이 현대 구조공학이 선택한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