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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역학

위험 기반 의사결정(Risk-Based Decision Making)

by adkim1 2025. 12. 31.

구조공학에서 가장 어려운 장면은 복잡한 수식을 풀 때가 아니라, 그 계산 결과를 바탕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다. 점검 결과는 애매하고, 구조물은 당장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신뢰도 지수는 기준값 근처에서 오르내린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괜찮다”와 “지금 개입해야 한다” 사이의 선택은 기술적 판단만으로는 내려지지 않는다. 전통적인 구조 안전사고에서는 이 순간을 가능한 한 피하려 했다. 기준을 넘으면 안전, 넘지 못하면 위험이라는 단순한 경계선 뒤에 판단을 숨겼다. 하지만 성능기반 설계, 신뢰도 설계, 베이지안 업데이트가 등장하면서 이 회피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구조 안전은 이제 연속적인 상태 변화 속에서 내려야 하는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바로 이 불편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기 위한 사고방식이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Risk-Based Decision Making)

 

위험은 확률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위험을 단순한 실패 확률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패 확률이 아무리 낮아도, 그 결과가 치명적이라면 그 위험은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실패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더라도 그 결과가 경미하다면 즉각적인 개입이 항상 합리적인 선택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위험은 “얼마나 자주 발생할 수 있는가”와 “발생했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의 결합으로 정의된다. 구조물의 용도, 상주 인원, 대체 시설의 존재 여부, 사회적 파급 효과는 이 두 번째 질문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이 요소들을 숨기지 않고 기술적 판단의 전면으로 끌어낸다. 즉, 구조공학은 더 이상 확률 계산 뒤에 숨어 있을 수 없게 된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아직 괜찮다’는 말을 바꾼다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는 “아직은 괜찮다”다. 하지만 위험 기반 관점에서 이 말은 거의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괜찮은가”가 아니라 “이 상태를 유지하는 선택이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위험인가”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에서는 관찰, 모니터링, 부분 보강, 사용 제한, 전면 보강, 철거가 서로 단절된 선택지가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인 단계적 선택이다. 위험이 낮을 때는 지속적인 관찰과 데이터 축적이 가장 합리적인 대응이 될 수 있다. 위험이 증가하면 부분 보강이나 사용 제한이 등장하고, 위험이 허용 범위를 넘어서면 철거조차도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이 접근은 “무너지기 전까지 사용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어느 시점에서 개입하는 것이 전체 위험을 최소화하는가”를 묻게 만든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유지관리 전략을 재정의한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이 도입되면 유지관리는 더 이상 사후 대응이 아니다. 점검과 모니터링 데이터는 단순히 기록으로 쌓이지 않고, 위험 수준을 갱신하는 입력값으로 작동한다. 베이지안 업데이트를 통해 신뢰도는 시간에 따라 변하고, 그 변화 속도가 바로 개입 시점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렇게 되면 보강 시점은 예산 주기나 관행이 아니라, 위험의 증가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불필요하 게 이른 보강은 줄어들고, 위험을 과소평가해 놓치는 상황도 줄어든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구조 안전을 정적 기준이 아닌 동적 관리 대상으로 바꾼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책임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이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있다. “확률이 낮으니 괜찮다”라는 말로 위험을 정당화하는 도구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이 접근법은 왜 지금 보강하지 않았는지, 왜 사용을 제한했는지, 왜 철거를 선택했는지를 명확한 논리와 수치로 설명하도록 강제한다. 이는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근거를 투명하게 만든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설계자와 관리자의 책임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디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안전이란 ‘위험이 없음’이 아니라 ‘선택의 정직함’이다

현대 구조공학에서 완벽하게 위험이 없는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안전을 선언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을 이해하고, 그 위에서 책임 있는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고 틀이다. 구조 안전은 더 이상 “괜찮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안전이란 어떤 위험을, 어떤 이유로, 어디까지 받아들였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위험 기반 의사결정은 그 설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현대 구조공학의 마지막 연결 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