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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역학

성능기반 설계(Performance-Based Design)

by adkim1 2026. 1. 3.

전통적인 구조 설계의 목표는 명확했다. 붕괴를 막는 것, 즉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이 목표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구조물에 요구되는 역할은 그보다 훨씬 넓어졌다. 지진 이후에도 병원은 기능을 유지해야 하고, 중요 교량은 즉시 통행이 가능해야 하며, 대형 시설은 복구 가능성을 전제로 설계되기를 요구받는다. 즉, 구조물은 단순히 “서 있는 것”을 넘어 어떤 상태로 버틸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성능기반 설계는 이 질문을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중을 먼저 계산하고 검토하는 대신, “이 구조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성능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가”를 먼저 정의한다. 이는 설계의 방향을 계산 중심에서 목표 중심으로 바꾸는 사고 전환이다.

 

 

성능기반 설계(Performance-Based Design)

 

 

성능이란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약속’이다

성능기반 설계에서 말하는 성능은 단일한 안전 기준이 아니다. 구조물은 서로 다른 위험 수준에 대해 서로 다른 성능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예를 들어, 자주 발생하는 작은 하중이나 약한 지진에 대해서는 거의 손상이 없어야 하고, 중간 수준의 하중에 대해서는 일부 손상은 허용되지만 기능은 유지되어야 하며, 극히 드문 극한 상황에서는 붕괴만 피하면 된다는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성능기반 설계는 위험 수준과 성능 수준을 쌍으로 정의한다. 이는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요구를 버리고, 대신 상황별로 합리적인 기대치를 설정하는 방식이다. 성능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전에 합의된 약속이 된다.

 

 

성능기반 설계는 위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성능기반 설계는 위험과 확률 개념 없이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성능을 요구할지는 그 상황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주 발생하는 하중에 대해 낮은 성능을 허용할 수는 없고, 극히 드문 하중에 대해 항상 무손상을 요구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따라서 성능기반 설계는 자연스럽게 확률, 신뢰도, 허용 위험 개념을 끌어들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능기반 설계는 위험 기반 의사결정의 설계 단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설계자는 “이 위험 수준에서는 이 정도 성능을 약속하겠다”는 선언을 구조적으로 구현한다.

 

 

성능기반 설계는 설계자의 역할을 바꾼다

전통적인 설계에서 설계자의 역할은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기준을 지키면 설계는 끝났다. 하지만 성능기반 설계에서는 기준은 출발점일 뿐이다. 설계자는 구조물의 용도, 중요도, 사회적 영향까지 고려해 어떤 성능 목표가 적절한지 판단해야 한다. 이는 설계자의 책임과 판단 범위를 크게 확장시킨다. 동시에 성능기반 설계는 설계자의 판단을 숨기지 못하게 만든다. 왜 이 수준의 손상을 허용했는지, 왜 이 성능을 목표로 설정했는지가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부담이지만, 구조 설계를 설명 가능한 기술로 만드는 중요한 변화다.

 

 

성능기반 설계는 계산보다 ‘의사결정 구조’에 가깝다

성능기반 설계는 종종 복잡한 해석 기법이나 고급 계산 방법으로 오해된다. 물론 비선형 해석이나 시뮬레이션이 자주 사용되지만, 그 본질은 계산이 아니다. 성능기반 설계의 핵심은 의사결정의 구조를 명확히 하는 데 있다. 어떤 위험 수준을 고려했고, 그에 대해 어떤 성능을 요구했으며, 그 성능이 충족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체계다. 이 체계가 명확하면 해석 방법이 달라져도 설계의 방향은 흔들리지 않는다. 성능기반 설계는 기술보다 철학에 가까운 설계 방식이다.

 

 

성능기반 설계는 ‘완벽한 안전’이라는 환상을 버린다

성능기반 설계가 던지는 가장 불편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완벽한 안전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대신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지킬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을 숨기지 않고, 사전에 정의하고, 설계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성능기반 설계의 핵심이다. 현대 구조공학에서 안전이란 더 이상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위험에 대해, 어떤 성능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성능기반 설계는 구조 설계를 계산의 기술에서 책임 있는 선택의 기술로 바꾼다. 그리고 이 변화는 위험과 확률을 이해한 이후에만 비로소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