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를 막아도 건물은 멈출 수 있다
전통적인 내진 설계가 목표로 삼아온 것은 인명 보호와 붕괴 방지였다. 이 목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진 이후 구조물이 서 있어도 내부 설비가 작동하지 않거나 출입이 불가능하면, 그 건물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상태가 된다. 병원이 진료를 하지 못하고, 데이터 센터가 멈추며, 주거 건물이 장기간 사용 불가가 되는 상황은 구조적 붕괴가 없어도 발생한다. 사용 가능성은 붕괴 이후에 남는 ‘현실적 성능’을 묻는 개념이다.

사용 가능성은 구조 부재보다 ‘비구조 요소’에서 결정된다
지진 이후 사용 가능성을 좌우하는 요소는 기둥이나 보만이 아니다. 배관, 전기 설비, 엘리베이터, 내장재, 파사드와 같은 비구조 요소는 상대적으로 작은 변형에도 쉽게 손상된다. 구조물은 안전해도 층간 변형이 커지면 설비가 파손되고, 낙하물이 발생하며, 내부 공간은 즉시 폐쇄된다. 따라서 사용 가능성을 설계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비구조 요소가 감당할 수 있는 변형 수준을 구조 설계의 핵심 제약 조건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허용 변형’이 사용 가능성의 핵심 지표가 된다
사용 가능성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물리량은 최대 응력보다 변형이다. 지진 중과 이후에 구조물이 어느 정도까지 변형되었는지, 그리고 그 변형이 설비와 마감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기능 유지의 기준이 된다. 작은 균열과 미세 변형은 허용될 수 있지만, 문이 닫히지 않거나 배관이 파손되는 수준의 변형은 즉시 사용 중단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사용 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설계에서는 층간 변형률 제한과 잔류 변형 관리가 핵심 설계 변수로 등장한다.
사용 가능성 목표는 건물의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구조물에 동일한 사용 가능성 목표를 적용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주거 건물과 병원, 창고와 관제 센터는 지진 이후 요구되는 기능 수준이 다르다. 성능 기반 설계의 연장선에서 사용 가능성은 건물의 사회적 역할에 따라 차등 설정된다. 어떤 건물은 즉각적인 기능 유지를 목표로 하고, 어떤 건물은 단기간 복구를 목표로 하며, 어떤 건물은 장기 복구를 전제로 설계될 수 있다. 사용 가능성은 기술적 판단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선택이다.
사용 가능성을 설계한다는 것은 ‘지진 이후를 상상하는 일’이다
사용 가능성을 설계에 포함시키는 순간, 설계자는 지진 직후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어떤 공간이 먼저 통제될지, 어떤 설비가 취약한지, 어디에서 기능이 끊길 가능성이 있는지를 미리 묻는다. 이는 설계를 보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진 이후의 혼란을 줄이기 위한 준비다. 결국 사용 가능성 설계란 구조물이 지진을 견디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진 이후에도 사회의 일부로 계속 작동하도록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내진 설계가 생명을 지키는 기술이라면, 사용 가능성 설계는 일상을 회복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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