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 기반 설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후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전통적인 내진 설계는 특정 지진 수준에서 구조물이 붕괴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 왔다. 이 접근은 최소한의 생명 안전을 보장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지진 이후 구조물이 어떤 상태로 남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성능 기반 내진 설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지진 후에도 사용 가능한지, 즉각적인 복구가 필요한지,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 시설인지와 같은 질문을 설계의 전면에 놓는다. 즉 성능 기반 설계는 ‘버텼는가’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버텼는가’를 설계 목표로 삼는다.

성능이란 ‘허용되는 손상의 범위’를 의미한다
성능 기반 내진 설계에서 성능은 추상적인 안전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허용 가능한 손상의 수준을 의미한다. 작은 지진에서는 거의 손상이 없어야 하고, 중간 규모의 지진에서는 수리가 가능해야 하며, 매우 큰 지진에서는 붕괴만은 피해야 한다는 식으로 지진 수준과 구조 상태를 단계적으로 연결한다. 이 사고방식은 구조물을 완벽하게 보호하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버리고, 현실적인 위험 관리로 설계를 전환하게 만든다. 성능이란 ‘안전’의 정도를 세분화한 언어다.
성능 기반 설계는 변형을 중심에 둔다
힘을 기준으로 설계하면 안전 판단은 단순해 보이지만, 지진처럼 큰 불확실성을 가진 하중에서는 한계를 가진다. 성능 기반 내진 설계는 최대 힘보다 변형 능력에 주목한다. 구조물이 얼마나 휘어질 수 있는지, 그 변형이 어디에 집중되는지, 그리고 그 변형이 기능 상실로 이어지는지를 평가한다. 이 때문에 성능 기반 설계는 선형 해석보다 비선형 해석과 훨씬 잘 어울리며, 구조물이 실제로 어떻게 거동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설계자는 ‘목표 성능’을 먼저 선택한다
성능 기반 내진 설계에서 가장 큰 변화는 설계자의 역할이다. 설계자는 단순히 기준을 만족시키는 계산자가 아니라, 구조물에 어떤 성능을 부여할 것인지 선택하는 판단 주체가 된다. 병원과 주거용 건물, 데이터 센터와 창고는 같은 지진을 겪더라도 요구되는 성능이 다르다. 성능 기반 설계는 이 차이를 설계에 명시적으로 반영하게 만든다. 이는 설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계의 의도를 명확히 만드는 과정이다.
성능 기반 내진 설계는 기술과 책임을 연결한다
성능 기반 설계는 단순히 해석 기법의 진화가 아니라, 설계 책임의 구조를 바꾸는 접근이다. 어떤 지진에서 어떤 손상을 허용했는지가 설계 단계에서 명확히 정의되기 때문에, 지진 이후 구조물의 상태는 ‘예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과도한 기대와 불필요한 책임 공방을 줄이고, 구조 안전을 사회적으로 설명 가능한 기술로 만든다. 결국 성능 기반 내진 설계란 구조물이 지진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미리 합의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내진 설계는 계산 중심 기술에서 의사결정 중심 기술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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