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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강건성(Robustness) 연쇄 붕괴를 겪은 구조물을 조사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이 상황은 설계에서 가정하지 않았다.” 폭발, 국부 충돌, 시공 오류, 예외적인 하중 조합 등은 대부분 설계 기준서의 바깥에 놓여 있다. 하지만 현실의 구조물은 기준서 밖의 사건들 속에서 무너진다. 이 지점에서 구조공학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면, 구조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그 답이 바로 강건성(Robustness)이다. 강건성은 특정 하중을 얼마나 잘 견디는가가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손상에도 전체 시스템이 얼마나 잘 버티는가를 의미한다. 강건한 구조는 첫 실패를 완벽히 막지 못해도, 그 실패가 구조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한 부재가 사라졌을 때, 구조는 즉시 .. 2025. 12. 19.
연쇄 붕괴(Progressive Collapse) 구조물이 무너질 때 가장 위험한 방식은 한 번에 전부 무너지는 경우가 아니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것은, 아주 작은 손상 하나가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전체 붕괴로 확산되는 상황이다. 이를 구조공학에서는 연쇄 붕괴, 또는 진행성 붕괴(Progressive Collapse)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지진뿐 아니라 폭발, 차량 충돌, 국부 화재, 시공 결함처럼 처음에는 국소적이고 제한적인 사건에서 시작된다.문제는 그 초기 손상보다, 그 손상을 구조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분배하느냐에 있다. 연쇄 붕괴는 강도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중의 흐름이 끊겼을 때 이를 대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발생한다. 연쇄 붕괴의 시작은 대개 하나의 핵심 부재 손실이다. 기둥 하나, 연결부 하나, 혹은 특정 보.. 2025. 12. 18.
구조 중복성(Redundancy)과 대체 하중 경로 재난 상황에서 구조물이 갑자기 붕괴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특정 부재 하나가 파괴되면서 하중이 더 이상 전달될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는 평상시에는 매우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부재 수가 적고, 힘의 흐름이 단순하며, 계산도 깔끔하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한 가지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부재는 절대 망가지지 않는다.” 현대 구조공학은 이 전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수많은 사고로 배워왔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구조 중복성(Redundancy)이다. 이는 구조가 한 부분의 손상을 겪더라도 즉시 전체 붕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설계 철학이다. 구조 중복성이란 쉽게 말해 하중이 흐를 수 있는 길을 하나만 두지 않는 것이다. 기둥 하나가 손상되더라도, 그 하중이 인접한 보와 기둥을.. 2025. 12. 18.
강–약 설계(Capacity Design) 구조 설계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모두를 강하게 만들 수 없다면,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가?” 현실의 구조물은 재료, 비용, 시공성이라는 한계 안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부재를 동일하게 강하게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재난 상황에서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강–약 설계는 이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즉, 구조물 전체의 강도를 무작위로 키우는 대신, 어떤 부재는 반드시 버티게 하고, 어떤 부재는 먼저 항복하도록 의도하는 설계 전략이다. 이 개념의 핵심은 강도의 크기가 아니라, 강도의 위계다. 지진이나 극한 하중이 작용하면 구조물 내부에서는 항복이 가장 약한 지점부터 시작된다. 이때 모든 부재가 비슷한 강도를 가지고 있다면, 항복은 예측할 수 없는 위.. 2025. 12. 18.
붕괴 메커니즘(Collapse Mechanism) 구조물은 한순간에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다가도, 그 내부에서는 이미 명확한 붕괴의 순서가 진행되고 있다. 이 순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설계자는 구조의 실패를 “예상 밖의 사고”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재료역학과 구조공학의 관점에서 붕괴는 우연이 아니다. 붕괴는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진행되는 구조적 시나리오이며, 이 시나리오 전체를 우리는 붕괴 메커니즘(Collapse Mechanism)이라고 부른다. 즉, 구조물이 어떤 부재부터 항복하고, 그 항복이 어떻게 다른 부재로 전이되며,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하중을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앞선 글에서 다룬 소성 힌지는 붕괴 메커니즘의 출발점이다. 하중이 증가하면서 한 지점에 소성 힌지가 형성되면, 구.. 2025. 12. 17.
소성 힌지(Plastic Hinge) 구조물이 하중을 받을 때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모든 부재가 탄성 범위 안에서 거동하는 것이다. 하중이 사라지면 원래 형태로 돌아오고, 흔적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지진처럼 극단적인 하중에서는 이 상태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순간 응력은 항복점을 넘고, 재료는 소성 변형에 들어간다. 이때 구조 전체가 무작위로 망가지는 대신, 특정 위치에서 변형이 집중되도록 만든 개념이 바로 소성 힌지(Plastic Hinge)다. 소성 힌지는 구조가 실패하기 직전의 현상이 아니라, 실패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허용된 변형의 형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소성 힌지가 형성된다는 것은 그 지점이 회전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마치 문이 경첩을 중심으로 열리듯, 부재의 한 구간에 변형이 집중되면서.. 2025. 12. 17.